No.21 대림절 셋째 주 12/17 토요일

“모든 기대, 그 너머”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9-14)

예수님에게는 왕 같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가식이나 야망, 고급 리무진이나 군대와 억압, 왕실 인장 같은게 없었습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왕좌를 지향합니다. 왕이나 예언자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왕으로서의 희망과 노래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와 달리 약한 중에 강하고 가난한 중에 부요하며, 어리석은 중에 현명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의 철학자는 혼란스러워하고, 유대인은 당황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능력의 범주에서도 벗어나는 분입니다. 부드럽고 자상하며 유연하지만, 때로는 벅찬 일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분은 화려한 성이나 도시, 왕조를 건설하는 데 연연하기보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진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지만 요한은 기독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제자들을 향합니다. 여러 제자들이여, 직접 보지 않는가? 그를 알지 않았는가? 그분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그분이 당신을 치유하시고, 먹이지 않으셨는가? 그분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폭력의 시대가 아닌 성령에 뿌리박힌 삶을.

–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부와 권력으로부터 돌아서서 가난한 자와 함께함을.

–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온전함을, 그래서 예수님의 떡과 포도주가 약속한 그 온전함을 갈망한다는 점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 노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주욱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희망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노래하며 바라기에 냉소주의에 빠지는 일 없이 두려워하지 않으며, 억압받는 느낌도 없고, 부담 없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은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특별한 왕으로 모셨기에, 노래하면서 두려움 없이 살아가기로 그분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기도

기쁨과 희망의 하나님,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소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하는 권능을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임재를 예측할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치유와 공급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계속 노래하며 희망을 바라보도록,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