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교회

대림절 묵상 12월8일 “만족 안에서 자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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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이라는 주제가 어려운 것은 비단 우리 시대만이 아니다. 17세기에도 만족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다루기 힘든 문제였다. 그래서 청교도인 제러마이어 버로스(jeremiah Burroughs)는 만족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보물](The Rare jewel of chritian Contentment)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기독교 고전으로 남아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책장에는 꽂혀있지 않다. 오히려 ‘소유의 풍부함’이나 ‘욕구의 탐닉’ 같은 세상적인 관심에 의존하며 만족을 누리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목들이 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탐심이라는 조류에 휩쓸리고, 상황만 보며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받은 것에 불만을 품거나, 다른 친구가 더 많이 가졌다고 실망한다. 그래서 자신의 상황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고칠’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고 한다.

우리는 ‘ 자기 부인’이나 ‘방종’, 이 둘 중 하나가 탐심에 대한 답이라고 믿기 쉽다. 그래서 잘못된 겸손으로, “나는 캐시미어 스웨터에는 관심이 없고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형편없는 저렴한 스웨터에만 관심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신만의 잘못된 거룩함의 개념이며, 교만만 키우게 될 뿐이다. 반대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스웨터를 다 사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리한 두 가지 접근은 모두 주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주님께 영광이 되는 방식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에게 선물을 풍성히 주시는 예수님을 소망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인 풍요에 소망을 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물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하심의 결과이며, 그분께 받은 것을 말씀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식으로 누림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사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신으로 삼고 마치 그것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갈증을 해소해주는 것처럼 좇고 섬기려 해서는 안 된다. 만족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심을 기억할 때 생긴다.

이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이 성장해 가면서 그것을 배워야 한다. 우울한 날의 태도든, 승진에서 떨어졌을 때의 반응이든. 어떤 것이든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늘 이와 같다. 즉 “주님으로 인해 지금 이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충족성(Christ’s all-sufficiency)이란 무엇인가?” 

만족이란 우리가 찾아야 할 값비싼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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