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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5 사순절묵상 04 “군함 대신 하나님의 보호하심”

2023.02.25 사순절묵상 04

“군함 대신 하나님의 보호하심”

땅 끝 낯선 곳에서 감당하는 사역에 위험과 시련이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도와줄 친구나 함께할 동료가 없다면 두려운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원산으로 옮긴 독립 선교사 하디의 사역은 그런 두려움과 외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일 년 동안 사역하던 하디는 1892년 11월 동해안 원산으로 옮겨 왔습니다. 부산 다음으로 개항장이 된 원산에서는 미북장로회의 게일(하디의 토론토대학 2년 선배)과 미감리회의 맥길, 토론토 출신 독립 선교사 팬윅이 선교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산교사들끼리 경쟁적이었던 부산과 달리, 원산 선교사들은 서로 협력하며 우호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기후까지 고향 온타리오와 비슷해 하디 가족은 훨씬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디는 1893년 시내 쪽에 아담한 시약소와 주택을 짓고 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원산에서의 사역은 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터져 한반도는 ‘전시 상황’이 되었습니다. 원산은 상대적으로 평온했지만,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인천과 평양, 의주 등 서해안 지역에서 이루어져 병참기지가 되면서 일본군 천지로 변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회의 지시하에 전쟁이 터지기 전 서울이나 미국 군함이 정박해 있는 인천,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본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독립 선교사였던 하디 가족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서울의 영국 공사관에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전보가 왔지만 하디는 원산에 남기로 했습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 본국 선교회에 보낸 하디의 편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외국 군함보다 주님을 더 믿고 있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라 여깁니다.”

원산에 남기로 했지만 여행은 불가능했고 외출도 삼가야 했습니다. 원산 주민들은 대부분 산골로 피신해 시약소를 찾는 환자도 적었습니다. 내한해서 처음 갖는 조용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디는 간혹 찾아오는 환자를 진료하며 어학과 성경공부, 기도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선교사로 자신을 돌아보며 선교 신학을 정립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1895년 여름,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군은 만주 땅에서 가져온 클레라균이 퍼져 하루에 3백 명씩 죽었습니다. 원산은 다시 공포에 휩싸였고, 유일한 의사였던 하디는 국적과 신분을 불문하고 전염병 치료에 매달렸습니다. 전쟁 중에 피난도 가지 않고 환자 진료에 매달리는 하디를 향해 원산 사람들은 “위험한 중에도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우리를 도와주었다.”며 신뢰와 존경을 표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디는 시약소를 찾는 환자들은 크게 늘었고, 시약소에서 드리는 주일 집회에도 조금씩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군함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선택한 하디에게 하나님은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묵상

  1. 외지에서 절대 위기에 처했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2. 마틴 루터가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새찬송가 585장)을 만든 배경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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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뿐만 아니라 가끔은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외로울수록 버거울수록 힘겨울수록 그 생각은 더 자주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이 땅에 선교하러 오신 선교사님들 역시 저마다의 힘겨움에 지칠 때가 있으셨겠지요. 그러나 복음의 사명과 예수님 때문에 견디며 이기셨겠지요.

돌이켜보면, 금수저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하나님 없으면 불행했겠다 싶고, 흙수저로 태어났기에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음을 생각하면 저마다에게 주신 상황이 은혜가 되어 주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2023년 사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이 없고 무엇 때문에 힘겨운 것이 아니라 예수로 충만하지 못하기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더욱 예수로 충만해지는 복된 기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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